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 발발 (문단 편집) == 남침의 주도자들 == * [[북한]] *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가해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해서 전쟁을 일으켜 북한 영토와 주민 전체를 도박판에 올인해놓고, 그 실책마저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에게 뒤집어씌워 자신의 권력 공고화에 써먹었다. 자신의 선제 남침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최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 철저히 숨겼다. 휴전협정 북한측 대표였던 이상조 같은 고위층조차 대규모 군사 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만 했지 진짜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라고는 예상도 못했다고 한다.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내각 수상. * '''[[박헌영]]''': 정치적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6.25 전쟁을 적극 추진하던 김일성에게 전쟁을 일으키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라는 등의 충격적 발언들을 했다.[* 그러나 남로당 세력은 이미 토벌로 사라졌거나 전향하였다. 지하에 숨어 저항하는 [[박갑동]]이나 [[이현상]] 같은 이들이 남아있다 쳐도 사실상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박갑동은 박헌영의 비서로 남로당 숙청 당시 사형까지 갔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석방된 후 중국,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재 도쿄에 거주 중이다.][* 다만 당시에는 박헌영 입장에서는 자기 지위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전쟁 외에는 수가 없기는 했다. 지지기반이 남쪽에 있었던 박헌영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남침을 하지 않아도 기반이 튼튼하고 심복을 결집하는 정치적 조직력이 뛰어난 김일성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46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09801|#]]]. 남로당의 역할을 강조해야 권력 지분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한, 권력욕으로 인한 시야 좁은 발언이었다. 또한 김일성이 스탈린 등과 전쟁 논의를 할 때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행동했다. 다만 김일성은 이미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난 상태여서 박헌영의 충격적 발언들은 그다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다. 빨치산이 패배만 거듭했기 때문에 이미 김일성은 박헌영의 허세를 매우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박헌영 때문이란 주장은 김일성의 책임 떠넘기기이다. 전쟁 시나리오를 짠 쪽은 박헌영이 아니라 소련 인사들이다. 북한 지도부가 전쟁은 결정했으나 국지전 경험만 있었고 전면전 경험이 없었기에 시나리오 같은 걸 짤 능력이 없어서 소련이나 중국 인사들이 짜줘야 했다.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내각 부수상 & 외무상. * [[김책]]: 개전 초기 총참모장 강건과 함께 중서부 전선의 북한군 침공 작전을 계획해 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켰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충청, 전라 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해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수안보에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세우지만, [[다부동 전투]]에서의 큰 피해,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유엔군의 기세에 밀려 조치원을 통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퇴했다. * [[김광협]]: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북한군 지휘관.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김일성으로부터 문책을 당했다. * [[방호산]]: 6.25가 발발하자 6사단은 [[대한민국 국군|국군]] [[제1보병사단|1사단]]이 담당하던 서부전선 쪽에서 쳐들어왔다. 개전하자마자 [[옹진반도]]와 [[해주시|해주]]의 국군병력을 순식간에 패퇴시켰다. 개전 사흘만인 27일에 김포반도를 점령했다. 남한 국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데, 바로 6사단이 남진하면서 점령한 충남, 전라도 전역, 경남 서부에서 수많은 인민재판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강건(북한)|강건]]: 6.25가 발발하자 총참모장으로 북한군을 이끌다가 9월 8일 고향에서 멀지 않은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 [[리승엽]]: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특별시장 격)으로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었다. 당시 인천상륙후 유일하게 UN군과 국군과 대치했다. * [[소련]] *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이 김일성의 침략 요구를 71번이나 거절한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공산통일과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해 승인해준 것이며 스탈린 또한 애초에 남북을 가르고 북부를 강제점거하고 북한을 세울 때부터 한반도를 군사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공산화 시키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경계했고 그것 때문에 침략을 미루고 있었던 상황에서 김일성의 지속적인 요청에 승인한 것은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김일성의 요청에 의해 전쟁의 시기를 앞당겼다 뿐이지 그렇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스탈린은 남한을 침공할 생각이 없었는데 김일성이 떼써서 전쟁을 허가해준 것이 아니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스탈린의 명령앞에서는 설설 기었는데, 김일성 따위가 생떼를 쓴다고 들어줄 위인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할 목적으로 탱크, 박격포, 야포, 대전차포, 장갑차나 기총 등의 무기들을 남한을 압도할 만큼 제공하고 훈련시켰다. 그에 비해 당시 남한에는 탱크가 단 1대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 [[테렌티 시티코프]]: [[소련군정]] 사령관을 역임했고, 김일성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 [[중국]] * [[마오쩌둥]]: 모택동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으며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는데 영향을 준다. * [[펑더화이]]: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총사령관을 했다. * [[쑹스룬]]: 모택동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팽덕회의 부장(副將).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